비뚤어진 사랑의 비극적 결말
2007-12-06 이수영
한 여성을 납치해 5일 동안 차에 가두고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때리는가 하면 몰래 정사 장면을 촬영, 협박하거나 심지어 상대의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른 강력 사건이 최근 신문지상을 채우고 있다.
감금에 협박, 강간에 살인까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상대에게나 가능 할 것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들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이들은 피해자를 죽도록 ‘사랑’한 사람들이다.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참지 못하고 우발적 범행을 저지른 이들의 변명은 한결같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은밀한 동영상을 퍼트리겠다’는 협박과 폭행을 당한 인기가수 아이비. 그녀의 사건도 잘못된 집착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연예인뿐 아니라 일반인도 집착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같이 죽자” 분신자살
추석을 앞둔 지난 9월 22일 민모(42·여)씨는 직장동료인 김모(47)씨가 “추석선물을 주겠다”는 말에 따라 나섰다 봉변을 당했다.
평소 김씨가 자신을 짝사랑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받아주지 않은 민씨. ‘마지막으로 담판을 짓자’는 민씨를 모텔로 유인한 김씨는 갑자기 민씨와 자신의 몸에 시너를 뿌렸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함께 죽자”며 라이터를 꺼낸 김씨. 당황한 민씨가 말리기도 전에 김씨는 자신의 몸에 라이터를 당겼고 순식간에 불덩어리가 됐다.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도망치는 민
씨를 뒤쫓는 김씨 모습은 모텔 CCTV에 고스란히 담겨 충격을 줬다. 김씨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결국 숨졌다.
또 다른 여성 손모(37)씨는 지난 10월 애인인 신모(41)씨에게 납치돼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신씨는 자신의 남동생까지 부추겨 손씨의 납치계획을 세웠다. 손씨가 만남을 끝내자고 했던 게 원인이었다. 신씨는 자신의 승합차에 손씨를 태우고 5일간 끌고 다니며 머리 등을 때려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혔다.
사건을 맡았던 경북 영덕경찰서 관계자는 “가해자 신씨는 피해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옷을 모두 벗기고 흉기를 준비하는 등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이런 짓을 하고도 ‘사랑해서 그랬다’니 말이 되느냐”며 혀를 찼다.
사건 당사자인 피해자 신씨의 심정은 더욱 절박하다. 일하던 가게까지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힌 그녀는 “(집에 돌아와) 일주일 동안 잠 한숨 못잤다. 사람 만나는 게 무섭다. 한때 나 자신처럼 믿었던 사람이라 공포가 더하다”고 말해 납치 때 받은 충격이 아물지 않은 모습이다.
정사 장면, 알몸 찍어 협박
집착이 부른 범죄에 돈이 얽히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 오모(42·여)씨는 내연관계에 있는 한모(42)씨에게 여러 장의 사진을 받았다. 사진에는 오씨가 또 다른 내연남과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를 빌미로 한씨는 1억원을 요구했다. 한씨가 친동생까지 동원, 오씨를 협박한 이유 역시 다른 남자를 만나는 오씨에게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 약점을 잡아 돈을 노리는 경우는 그나마 양반이다. 애인의 알몸과 정사장면을 찍어 협박한 사례는 거의 정신병 수준이다.
올 가을 서울에 있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언론사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최모(24·여)씨. 가수 지망생이던 이모(30)씨와 아마추어 그룹사운드 멤버로 만난 그녀는 재미있고 자상한 이씨에게 매력을 느껴 사귀게 됐다.
2년간 만나며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최씨는 결국 이씨에게 한 달 전 이별을 고했다. 평소에도 술을 좋아하는 그의 주사가 극도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두 달 전엔 시간이 늦어 집에 돌아가겠다는 최씨를 침대에 묶어놓고 두 시간여 동안 때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남자친구 곁을 떠난 최씨는 지금 더 큰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최씨의 ‘은밀한 사생활’을 손에 쥐고 돌아올 것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씨는 “(이씨가) 관계를 가지는 게 자연스러워지자 어느 날 휴대폰카메라를 들이댔다. 황당해서 이런 걸 왜 찍느냐고 물어봤다. ‘널 너무 좋아하는데 혹시 도망 갈까봐 찍는다’고 하더라. 그땐 농담인줄 알았는데 이제 사실이 됐다”며 울먹였다.
부모님께 알려질까 두려워 경찰에 신고도 못하겠다는 최씨. 그녀는 기자와 만나면서도 불안한 듯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랑싸움’ 아니라 ‘목숨싸움’
지난해 11월 헤어진 연인에게 두 달 이상 스토킹을 당한 여성이 결국 살해됐다. 그 때 피해 여성은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다음날 피해자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경찰이 바로 손을 쓰지 않고 ‘사랑싸움’으로 가볍게 여긴 게 화근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0월 이 사건을 경찰의 생명권 침해로 결론지었다. 담당 경찰관은 징계를 받고 좌천됐다.
인천남동서의 한 경찰 관계자는 “올 들어 헤어진 연인에게 폭행이나 협박을 당했다는 신고가 꽤 자주 접수된다. 예전이라면 연애하다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으로 보고 넘어갔겠지만 직접 피해자를 만나보면 아주 심각한 형사사건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벌어지는 사건들은 사랑싸움이 아니라 ‘목숨싸움’이다. 경찰이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 주변에 사랑을 넘어선 ‘집착의 병자’가 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