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病魔) 보다 더 무서운 건 ‘인마’(人魔)
2007-10-04 박혁진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동거녀의 치료비를 훔친 ‘파렴치’한 2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 달 19일 광주 북부경찰서는 8월 31일 광주 북구의 한 원룸에서 자신의 동거녀 치료비 2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절도)로 A씨(29)를 긴급체포했다고 밝혔다. A씨는 조사과정에서 자신의 범행을 일체 부인하고 있으나 경찰은 A씨가 범인임을 보여주는 여러 물증들을 확보하고 조만간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다. 특히 B씨는 돈을 잃어버렸지만 이를 돌려받을 길이 없는 탓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파렴치’한 동거남의 절도 행각으로 몸도 마음도 멍들어 버린 한 여성의 안타까운 사연 속으로 들어가보자.
A씨와 동거녀 B씨(38)는 2년전 광주 지역의 한 노래방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동거를 시작했다. B씨는 몇 년 전 남편과 이혼한 뒤 두 자녀를 키우며 힘들게 생활해왔지만 A씨를 만나면서부터 다시금 삶의 의욕을 갖게 됐다. A씨외의 만남 이후 한 동안 어긋났던 자신의 인생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초등학생 남매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작은 전셋집을 얻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다시 시작된 불행
어느 정도 돈이 모였다 싶던 지난 6월, 그에게 다시금 불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몇 개월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골수이식을 받지 않으면 몇 개월 안에 사망한다”는 소식까지 전해 듣게 된 것.
B씨는 병마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의지 하나로 아이들을 사회복지시설에 맡기고 본인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치료과정은 고통스러웠다.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B씨는 2년여에 걸쳐 모은 2000만원을 전세금으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백혈병 판정을 받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치료비로 사용해야만 했다. 전세금을 써야하는 상황에 피눈물이 났지만 그래도 사는게 우선이었다. 그래야 아이들도 보고 돈도 다시 벌 수 있었다.
이처럼 항암치료를 받으며 삶의 의지를 불태우던 B씨에게 병마보다도 더 지독한 ‘인마(人魔’)가 찾아왔다. 그 인마는 다름 아닌 2년 동안 자신이 의지하던 동거남 A씨였다. 2년 동안 악착같이 일하며 모아둔 돈 2000만원을 가지고 도망쳐 버린 것이다.
B씨는 신용불량자인 탓에 은행에 현금을 저축할 수 없었고 이를 집안에 보관해왔다. 병원에 입원했던 B씨는 A씨에게 돈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며 병원으로 가져오라는 부탁을 했지만 A씨는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집안에 있어야 할 돈도 제자리에 없었다. 그는 A씨 이외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돈이 있는 장소를 말한 적이 없었다.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버팀목이자 생명과도 같은 ‘쌈짓돈’을 자신이 가장 믿어왔던 동거남이 가지고 달아난 것이다.
B씨는 A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은 추적 끝에 A씨를 검거했으나 A씨는 경찰 조사에서 “돈을 훔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A씨가 B씨에게 “미안하다. 돈의 일부를 돌려주겠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 점 등을 토대로 A씨를 추궁하고 있다. 또한 B씨가 돈의 장소를 알려준 사람이 A씨 이외에 없었던 점도 A씨가 범인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또한 A씨는 B씨가 백혈병 선고를 받은 후 새로운 여자를 만난 것으로 밝혀졌다.
치료비 잃어버리고
병세 급속 악화
마음이 무너져버리자 몸도 급속히 악화됐다. B씨는 치료비를 도둑맞은 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혈중 산소 농도가 떨어져 피부가 푸른빛으로 변하는 청색증이 나타나는 등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경찰은 A씨가 조사과정에서 “하루빨리 나아서 사회복지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살고 싶었는데, 이마저 어렵게 됐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뿐”이라는 말만 되뇌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B씨는 그 동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절망감에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라며 “B씨는 지금 보상받을 길도 없는 막막한 상황에 처해있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관계자는 “살기 위해 발버둥 쳐온 B씨의 처지가 딱할 뿐”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현재 도난당한 돈을 회수하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으나 A씨가 혐의를 계속 부인하고 있어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A씨에 대해 여죄를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