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朴다르크’ 꿈꾼 여성 정치인, 박영선
세월호 정국 흔들린 리더십 ‘슬픈 법 만들고 슬프게 떠났다’
첫 여성 법사위원장·원내 대표 ‘ 제2의 박근혜’꿈꿔
검찰, 재벌, 이명박 저격수 10년 정치인생 숱한 화제
[일요서울 | 홍준철 기자] 2014년 5월 세월호 정국 속에 탄생한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전 원내대표. ‘새로운 야당을 만들겠다’며 원내 대표선거에 나서 야당 정치사에 첫 여성 원내 사령탑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난파 일보 직전에 야당으로서 갖춰야 할 선명성도 이를 추스릴 구심점도 없는 그야말로 봉숭아 학당 수준이었다. 박 전 원내대표는 강경파로서 집권 여당에 맞서 세월호 정국을 돌파할 수 있는 ‘박다르크’로 추앙받았다. 7.30재보선 패배 이후에는 김한길-안철수 두 공동대표가 물러나면서 대표격인 비상대책위원장까지 맡으면서 책임감은 더욱 막중해졌다. 밖으로 세월호 정국을 이끌고 안으로 제1 야당으로서 위상을 높여야만 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 협상에 발목이 잡히고 비대위원장 영입도 물 건너가면서 급기야 모든 당직을 내려놓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제2의 박근혜’를 꿈꿨던 그의 대망론 역시 함께 날아가는 불운의 정치인으로 전락했다. 박영선 전 원내대표의 10년 정치 인생을 훑어봤다.
“원내대표직 그 짐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10월4일 박영선 전 원내대표는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서한을 통해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통상 국회 기자회견장을 통해 직을 사퇴하는 게 관행이지만 박 전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일문일답도 없이 조용하게 자리를 떠났다. 그는 이메일을 통해 “책임이란 단어에 묶여 소신도 체면도 다 버리고 걸어온 힘든 시간이었다”며 “세월호 비극의 한 복판인 지난 5월8일 원내대표로 선출되던 순간부터 이미 예견했던 일”이라고 담담하게 소회를 밝혔다.
이어 박 전 원내대표는 세월호 특별법 협상 관련 “흔들리는 배 위에서 활을 들고 협상이라는 씨름을 벌인 시간”이었다며 “직업적 당 대표를 위해서라면 그 배의 평형수라도 빼버릴 것 같은 움직임과 일부 극단적 주장이 요동치고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고 ‘박영선 흔들기’에 나선 일부 강경파들을 겨냥 쓴소리도 보냈다. 나아가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한 지금 우리 당이 겪고 있는 고통은 치유되기 힘들다는 것을 어렵사리 말씀드린다”며 차기 당권을 둘러싼 계파간 알력과 다툼이 도를 넘었음도 인정했다.
여성으로는 헌정 사상 첫 원내사령탑에 오른 지 149일 만에 박 원내대표는 유족들이 반대하는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을 만들어놓고 평의원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꽉 막힌 세월호 정국 속에 박 전 원내대표의 리더십은 연일 시험무대에 올라야 했다. 당초 ‘강경파’로 알려진 그였지만 여당과 세월호 특별법 협상과정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밀어준 의원들뿐만 아니라 지지세력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았다.
박 전 원내대표는 야당 대표로서 세월호법 처리에 여당과 두 번이나 합의했지만 유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두 번 다 협상 내용을 번복하면서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 안팎에서 유가족들과 ‘사전협의가 없었다’는 의혹까지 받아 ‘세월호법을 만들면서 왜 유가족 의견을 배제했느냐’는 뼈아픈 지적에 박 전 원내대표는 휘청거렸다. 오히려 협상 파트너였던 여당 지도부가 박 전 원내대표를 옹호하는 기이한 사태까지 일어나는 등 박 전 원내대표의 강경이미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당내 주류이자 친노 정파의 수장격인 문재인 의원이 세월호 유족의 반발을 무마한다는 핑계로 광화문 동반 단식에 나서면서 박 전 원내대표를 대놓고 압박했다. 당내 일부 초재선 강경파는 ‘원내대표직 사퇴’를 요구하고 문 의원은 세월호 유가족편에 서자 박 전 원내대표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7.30 재보선 패배에 따른 당 지도부 총 사퇴로 당 대표격인 비상대책위원장까지 겸임하면서 박 전 원내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은 정치권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8월 4일 비대위원장으로 확정된 자리에서 박 전 원내대표는 “피하고 싶은 심정 있었지만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며 독배를 마시는 심정으로 중책을 떠안았다. 파산지경의 당을 추스르고 20대 총선 승리를 위한 기반도 다져야 했다.
특히 내년 1월 20대 공천권을 좌지우지할 정기전당대회가 예고된 만큼 박 전 원내대로선 최대의 위기이자 기회의 순간을 맞이했다.
2011년 박근혜 대통령도 당시 한나라당이 ‘차떼기 정당’ 오명에 시달리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역풍에 당이 무너져갈 때 대표로 나서 당 재건에 나섰다. 박 대통령은 당사를 팔아 빚을 갚는 대신 천막 당사로 옮겨 먼지를 마시며 당무를 봤다. 또한 고강도 쇄신책을 내놓으면서 그해 17대 총선에서 기적적으로 121석을 따냈고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박다르크’라는 별명이 생긴 시점도 이 당시다.
박 전 원내대표 역시 박 대통령처럼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여당과 합의한 특별법 협상안에 대해서 국민과 유가족들에게 설명이 미흡했고 그리고 힘들게 얻은 협상안에 대해 당내 일부 강경파들의 반발을 무마시키지도 못하면서 ‘속살’만 보여주고 리더십 한계만 보여준 셈이다. 이런 실수는 비대위원장 영입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당초 김부겸, 조국 등의 비대위원장 영입이 무산되자 새누리당 출신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 카드 역시 당내 일부 강경파들의 ‘반발’로 무산되면서 박 전 원내대표는 사면초가에 빠지게 됐다. 급기야 박 전 원내대표는 ‘탈당 의사’까지 밝히며 강하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당 안팎의 여론은 ‘당 대표라는 인사가 탈당을 운운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역풍에 휩쌓였고 사실상 ‘식물 대표’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급기야 새정치연합은 의원들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통해 ‘세월호 특별법 수습을 위한 마지막 노력을 한 뒤 그 결과에 관련 없이 사퇴한다’는 의견을 냈고 박 전 원내대표가 수용하면서 일단락됐다. 결국 박 전 원내대표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법’이자 기존 협상안과 별반 차이가 없는 합의안을 도출했고 약속대로 원내대표직을 내놓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법’을 만들고 박 전 원내대표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정치인’이 됐다.
박 전 원내대표가 원내대표직을 자신사퇴하며서 “낯선 정치에 뛰어든 지난 10년간의 경험에서 소리만 요란했지 정작 목표는 이뤄지지 않는 많은 경우를 목도했다”고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10년차 여성 정치인으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고 주목을 받을 정도로 뜨거운 이슈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쿨한 여성 정치인이기도 했다.
이명박 BBK, 삼성, 검찰 쎈놈과 맞짱
1960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박 전 원내대표는 2004년 초 MBC 선배인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에 의해 당 대변인으로 발탁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방송 기자와 앵커 경력으로 다진 대중적 인지도를 기반으로 ‘당의 입’으로 맹활약해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과반을 확보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비례대표로 당선돼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기획재정위원으로 활동하며 금산분리법 통과 등 재벌개혁에 앞장섰다. 특히 금산분리법을 소급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국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2007년 대선 때는 정동영계의 핵심 측근으로 대선 후보 비서실장을 지내며 ‘BBK의혹’을 주도적으로 파헤쳐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BBK 저격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박 전 원내대표는 이 후보에게 “저 똑바로 못 보시겠죠?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말해 강단있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의 수도권 참패 분위기 속에서도 서울 구로을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18대 국회에서는 법제사법위원회와 정보위원회 간사로 활약하면서 이명박 정부를 견제하는 최전방 공격수 역할을 했다. 천성관 검찰총장, 김태호 총리 후보자 낙마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사법개혁특위 검찰소위 위원장을 맡아 검찰 개혁에 팔을 걷어붙였다. 손학규 대표 체제로 전환된 민주통합당에서는 여성으로 처음 당 정책위 수석부의장으로 기용돼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데도 앞장섰다.
이른바 ‘3+1(무상 급식·의료·보육+반값 등록금)’ 등 보편적 복지 정책을 설계했다. 2011년 치러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천정배 추미애 신계륜 의원 등 쟁쟁한 경쟁자를 모두 제치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돼 승승장구했다. 비록 무소속 시민사회 후보로 나선 박원순 현 서울시장과의 야권 단일후보 경선에서 패해 본선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무조건 양보’로 박원순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박 시장의 당선을 도와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정치권 헌정사상 ‘여성 최초’ 탄탄대로
이후 당과 국회에서 잇따라 ‘여성 최초’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2012년 1·15 전당대회를 통해 최고위원에 뽑혀 한명숙 대표와 함께 민주당에서는 최초로 여성 선출직으로 지도부에 입성했고, 19대 총선에서 구로을에 출마해 3선에 성공한 뒤 첫 여성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에 올랐다.
이후 국회 본회의의 관문인 법사위를 맡아 외국인투자촉진법에 반대하고, 검찰 개혁법안인 상설특검법과 특별감찰관법을 관철하는 등 제1야당의 선명성을 강조했다. 법안 처리와 관련해 새누리당으로부터 ‘월권을 행사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법사위 내에서는 여야 협의에 따라 원만한 운영 능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니면서 주목을 받았던 박 전 원내대표. 당분간 TV화면에서 보기는 힘들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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