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

“우리 문화·역사를 폄하하는 시각 바로잡고 싶다”

2014-09-22     조아라 기자

스테디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열풍 일으켜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日문화 인식하는 시각 열어

[일요서울 | 조아라 기자]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문화유산 대중화에 앞장선 유홍준 교수. 미술사학자로서 쌓은 지식을 담고 날카로운 필체로 쓴 그의 책은 지난 20년간 스테디셀러가 됐다. 최근에는 일본 내 우리 문화재를 다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본편’을 출간하며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또 오는 12월까지 매주 ‘문화유산을 보는 눈’이라는 주제로 강의도 진행할 예정이다. 지난 2월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를 정년퇴임한 그는 석좌교수로 남아 연구와 집필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유 교수는 정년퇴임 강연에서 “공부를 위한 공부보다는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하는 것을 더 신경 쓰겠다”며 미술사 연구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다.


‘미술사학’은 일반인들에게 다소 거리감이 있는 학문이다. 낡고 고루한 것을 다룬다는 편견 때문이다. 하지만 유홍준 교수는 그런 학문 분야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한때 문화유산 답사 열풍을 몰고 올 만큼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이하 답사기)’는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서 등단 후 유 교수는 ‘젊은이들을 위한 한국 미술사’ 강의를 진행했다. 그러다 ‘한국 문화유산 답사회’를 만들어 함께 문화유산의 현장들을 답사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답사기다. 이 책은 1993년 출간 이후 300만부가 넘게 팔리는 등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답사기는 대중에게 전통 문화유산의 가치를 다시금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유적답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1990년대 대학가에서 교양강의 교재로 사용됐던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대신하는 필독서가 됐다.



‘과정의 중요성’ 담은 답사기

답사기에는 생생한 현장감은 물론 문화유산에 대한 전문가적 평, 소소한 주변 에피소드까지 담겨 있다. 단순히 답사 현장만을 책에 담지 않은 것은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던 그의 의도에서였다. 그는 “현대사회가 잃어버린 많은 것들 중 하나가 과정의 중요성”이라고 지적하며 “책을 통해 그 과정도 같이 보여주려 했다”고 속내를 전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문화유산 답사’라는 개념을 상기시켜서인지 유 교수 자신도 답사기를 저술한 일을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꼽았다. 알면서 보면 더 즐거울 수 있다는 자신의 호소를 동시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겼다는 점이 보람이라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7편의 국내 답사기를 저술한 데 이어 작년에는 답사기-일본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일본 속 한국문화’, ‘일본문화의 정수’를 찾기 위해 집필한 책으로 규슈, 아스카를 거쳐 지난 5월 교토편이 출판됐다. 그가 일본편을 집필한 이유는 한일 양국이 이상적이고 공존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유 교수는 일본편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국내편 7권을 쓴 내공과 우리 문화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썼다”며 자신감을 드러낸 바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문화와 역사를 폄하하는 시각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대학 강단을 떠났지만 활발한 대중강연을 이어가고 있는 그는 강연마다 이 점을 강조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문화는 굉장히 뛰어난 문화다. 하지만 그 내용과 당시 사람들의 노고와 위대한 정신이 국민들에게 잘 인식 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답사기가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우리 문화의 뛰어난 점을 현장에서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국민 전체가 노력할 때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교육이나 저술이 필요한 순간에 즉각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항상 준비해야 한다. 내가 하려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노력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면 점점 역사인식의 보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일본과 우리는 해묵은 역사적 관계로 얽힌 만큼 언급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펜을 들은 이유는 무지와 선입견으로 일본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일본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곳”이라며 “나는 독자들에게 이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일본을 이렇게 보았고 그 문화를 이렇게 인식하는 것, 그 시각을 열어준 것으로 내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한일 양국의 이상적 공존 가능성 담아

지난해 출간된 아스카와 나라편에서는 가야와 백제 사람들이 일본 고대문화에 끼친 영향을 주로 다뤘다. 일본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교토편에서는 고구려, 신라 등 도래인이 일본에 끼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다뤘다. 신라의 진씨가 이룩한 광룡사 이야기, 고구려 절터가 있던 야마시로초의 고구려 사람들이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를 다룬 이야기, 헤이안 시대 이후 1000년 동안 수도였던 교토 등은 그가 구상했던 교토편의 이야기다.

유 교수는 교토편 출간 이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교토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17개나 있는 교토를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 것이 특징”이라며 “일본미의 특질과 일본인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문화유산에 대해 내가 아는 한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답사기 일본편은 일본어로 번역돼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에 그는 “일본 독자를 의식한 것은 아니다”며 “외국인이 쓴 그 나라 이야기라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대중적 인기, 논란의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는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교수와 동 대학 박물관장을 거쳐 2002년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전임교수로 임명됐다. 한때 3선 개헌 반대 시위 도중 붙잡혀 옥살이를 한 적이 있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운 영남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유 교수는 2004년부터 2008년 2월까지 제3대 문화재청 청장을 역임했다. 미술사학자로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그가 청장이 된 것은 답사기를 통해 얻은 대중적 인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문화재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청장으로서 그가 보여준 몇몇 행동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그는 2004년 9월 경복궁 경회루와 자경전에서 세계검사대회의 만찬행사를 허가했다. 일반인은 궁궐에 도시락 등 식음료를 반입할 수 없으며 궁궐에서는 지정된 장소를 벗어나 담배를 피울 수도 없다. 하지만 당시 행사장에는 담배 재떨이가 준비됐고 현장에서 600명분의 등심요리가 즉석에서 조리됐다. 또 문화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조명을 설치하고 경회루 기둥을 직선으로 비췄다. 뿐만 아니라 참석한 이들은 궁궐 내에서 문배주(酒)를 마시며 여흥을 즐겼다.

이 경복궁 만찬은 사회적 지탄을 불러왔다. 유 교수는 2011년 한 방송에 출연해 당시 논란에 대해 해명하기도 했다. 그는 “원래 국제대회를 하면 마지막 만찬이 제일 중요하다. 다른 나라들 역시 국제대회 마지막 만찬은 고궁이나 박물관 로비에서 한다. 국빈 대접을 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사실 호텔 만찬은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설명했다.

이어 “그때 국회에도 불려갔다. 다 반대했는데 내가 ‘빌려줄 수 있는 국제 대회나 많이 유치해오라. 외국 손님들에게 우리의 위용을 보여주는 것이 문화재가 가진 본 뜻이다'고 설득했다. 또 내가 그때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으면 조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국제대회 만찬장으로 썼다. 국제테니스대회, 국제검사대회 등 다 빌려줬다”고 덧붙였다.

2007년 5월 경기도 여주군 효종왕릉에서는 국회의원들과 함께 버너 취사를 해 논란이 됐다. 세종대왕 탄신 610돌 기념 숭모제 직후 효종왕릉을 방문한 그는 국회의원 30명과 취사와 음식물 반입이 금지된 사적지 재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 앞마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LP가스통, 냉장고 2대, 전자레인지 등을 갖다놓고 음식 조리를 해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효종왕릉은 사적 제195호로 보호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제459호 회양목이 보존돼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곳의 재실은 전국에 남아 있는 재실 중 보존 상태가 좋아 당시 보물지정까지 검토되는 곳이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문제가 커지자 문화재청은 해명자료를 통해 “궁릉에서 제례 후 음식을 먹는 것은 오래된 관행”이라며 “앞으로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이런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발표하며 무마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강원도 양양 낙산사, 수원 화성 서장대, 창경궁 화재 사건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화재 진압 매뉴얼 제작과 스프링클러 설치 등에 미흡한 모습을 보였다. 문화재 보호에 안일한 생각은 결국 국보1호 숭례문 화재로도 이어졌다. 유 교수는 숭례문 화재의 책임으로 청장 직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그가 더 많은 비난을 받은 것은 낙산사 수습과정에서였다.

그는 2005년 낙산사 화재 이후 한 라디오프로그램에서 “낙산사는 건물 전체가 50년대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국민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오래된 건물은 아니다”라고 말해 청장으로의 자질을 의심케 했다. 또 “낙산사에 보물이 세 점 있는데 석탑은 피해가 없고 관음보살상은 사전에 피난시켜 안전하다. 동종의 경우 종각은 완전히 불탔지만 동종 자체는 육안으로는 그다지 피해가 없다고 보고가 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1채의 낙산사 건물들이 불탄 것도 우리가 도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원에 큰 무리가 없다”고 말해 문화재 화재가 그다지 큰일이 아니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

산불로 훼손된 지 1년6개월여 만에 복원된 낙산사 동종의 내부에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이름이 새겨진 사실이 후에 밝혀져 논란이 확산됐다. 비난 여론이 거세자 문화재청은 “통상 기록을 남기는 차원에서의 관행”이라면서도 “유 청장의 이름을 빼고 복원기를 다시 새겨 넣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 당시 유 교수는 프랑스와 네덜란드로 출장 중이었다. 사건 이후 급히 귀국한 그는 숭례문 소실에 대한 문화재청 책임 논란에 휩싸였다. 이와 함께 유 교수의 출장이 대한항공에서 일부 경비를 지원받은 부부 동반의 외유성 출장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받기도 했다. 당시 그는 숭례문 소실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후 수습을 이유로 보류하다 2008년 2월 사표를 수리했다.

chocho621@ilyoseoul.co.kr